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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오늘도 힘차게, 자신 있게 —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팔린다 어릴 적에 웅변·미술 유치원을 다녔다.가끔 꺼내 듣는 녹음 테이프가 있다. 작고 째지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외치는 소리."오늘도 힘차게! 자신 있게!"그 덕분이었는지 중고등학교 발표도, 대학교 과제 발표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교단 앞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는 게 자연스러웠다.사회에 나와서는 말없는 말이 좋아졌다그런데 막상 사회생활을 해보니 달라졌다.크게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보다, 조용히 듣는 사람 옆에 있고 싶어졌다. 상대방이 스스로 얘기하는 걸 들을 때 시간이 잘 간다. 억지로 무언가를 채우지 않아도 대화가 흐른다.어느 날 아는 동생이 밥을 먹다가 말했다."형은 왜 말이 잘 통하냐."젓가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나 네 얘기만 듣는데 뭘 잘 통하냐."그날 한 시간 동안 내가 한 말은 겨우 이 정도였다.".. 2024. 12. 17.
[일상일기] 그토록 원하던 대학교에서 받은 첫 경고 — 학사경고에서 과대표 연임까지 드디어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합격 통보를 받던 날,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우셨다. 그동안 고생한 장면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나도 잠을 못 잤다. 설레서, 기뻐서, 뭔가 해냈다는 감각이 온몸에 가득했다.하지만 막상 대학 생활은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학사경고OT, MT, 술자리. 예체능계라서 그런지 친구들은 너무 개방적이었다. 조용한 성격인 나는 그 분위기 속에서 점점 구석으로 밀려났다. 수업보다 아르바이트가 더 편했다. 커피숍, 롯데리아. 새벽까지 일하고 낮에 학교에 나갔지만 강의실 의자에 앉으면 눈이 감겼다.그렇게 1년이 흘렀다.학교에서 종이 한 장이 왔다.학사경고.손이 떨렸다. 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종이를 바로 찢었다. 부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우편물을 없애버렸다.그날 밤 잠을 이루.. 2024. 12. 17.
[투자일기] 선장은 포인트를 찾아도 떠난다 — 절실함은 집착이 아니다 낚시를 하러 가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곳을 포인트라고 한다.지형, 수심, 수온, 먹잇감의 유무. 다양한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그 지점을 찾으려면 물고기의 습성과 환경을 이해해야 한다.그런데 낚싯배를 모는 선장은 포인트를 찾아도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최고의 어획량을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엔진을 다시 켜고 또 다른 장소로 배를 민다. 파도 소리를 가르며 배가 움직이는 그 순간에도 선장의 눈은 이미 다음 포인트를 향하고 있다."여기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으니, 난 끝까지 여기서 잡아 보겠다!"이런 마인드는 선장에게 없다. 절실함은 집착이 아니기 때문이다.문어가 그물에서 나오지 못하는 이유문어는 바다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린다. 지능이 높고, 환경 적응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난 생물이다.그.. 2024. 12. 15.
[투자일기] 처음엔 선만 긋는다 — 데생이 투자에게 가르쳐 준 것 미술학원 첫날, 선생님은 연필을 쥐어주고 하얀 종이 앞에 앉혔다.그리고 말했다. 선을 그어라.직선, 사선, 동그라미. 힘을 빼고, 힘을 주고, 가늘게, 굵게. 종이 위에 연필이 스치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선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다.마음속으로 투덜댔다. 시간도 없는데 왜 선만 긋는 거지.그런데 그 선의 정확도와 강약 조절이 어느 수준에 올라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구, 원기둥, 입방체. 다양한 각도에서 형태를 그리고, 광원의 위치에 따라 명암을 달리 표현하는 훈련이 이어졌다.기초 없이 바로 데생을 그리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안다. 겉모습은 있지만 설득력이 없는 그림이 된다.데생의 평가 요소 4가지미대 실기시험의 주요 평가 기준은 네 가.. 2024. 12. 14.
[일상일기] 우리 가족의 뿌리가 닿아있는 도시들 — 광양 부산 순천 광주 대전 부모님은 전라도 광양에서 태어나셨다.두 분 다 줄곧 광양에서 지내시다가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이사하셨다. 그래서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아내는 순천 사람이다. 나는 직업 특성상 서울, 부산, 광주를 옮겨다녔고, 광주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2023년 3월 26일, 오후 4시 52분. 우리 보물 1호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대전에서 근무 중이다.광양, 부산, 순천, 광주, 대전.우리 가족의 뿌리가 닿아있는 도시들이다.사전연명의료의향서이번에 부산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보물 1호 이렇게 보는 건 너무 좋은데, 한편으론 씁쓸하다."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신청했다."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스스로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2024. 12. 14.
[일상일기] 조카의 합격 소식 — TV 없는 거실과 1,000권의 책이 만든 결과 며칠 전 둘째 조카가 수시 면접을 봤다.어제 전화가 왔다. 합격이라고.전화 너머로 누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온통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집안이 축제 분위기라고 했다. 하루빨리 부산에 가서 직접 축하해줘야겠다.TV 없는 거실, 책장으로 둘러싸인 집누나 집에 갈 때마다 들어서는 순간 느낌이 다르다.거실에 TV가 없다. 벽면을 따라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책장 안에 책상이 있고, 보드판이 있다. 거실 한쪽에 의자를 두고 앉으면 마치 작은 도서관 같다.처음 갔을 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텅 비어있어야 할 자리에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매형도 퇴근하면 공부를 하고, 아이들도 하교하면 바로 씻고 공부를 한다. 그렇게 루틴이 만들어져 있다.한 번은 물었다. "너무 답답하.. 2024.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