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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일기

[투자일기] 데생처럼 투자하라 —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법

by 우노디야(백운호) 2024.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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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선만 긋는다

미술학원 첫날, 선생님은 연필을 쥐어주고 하얀 종이 앞에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선을 그어라.

직선, 사선, 동그라미. 힘을 빼고, 힘을 주고, 가늘게, 굵게. 종이 위에 연필이 스치는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선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다.

마음속으로 투덜댔다. 시간도 없는데 왜 선만 긋는 거지.

그런데 그 선의 정확도와 강약 조절이 어느 수준에 올라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구, 원기둥, 입방체. 다양한 각도에서 형태를 그리고, 광원의 위치에 따라 명암을 달리 표현하는 훈련이 이어졌다.

기초 없이 바로 데생을 그리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안다. 결과물이 뻔해진다. 겉모습은 있지만 설득력이 없는 그림이 된다.


데생의 평가 요소 4가지

미대 실기시험의 주요 평가 기준은 네 가지다.

관찰력, 기술력, 창의성, 완성도.

대상을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관찰했는가. 재료와 표현 기법을 얼마나 자유롭게 다루는가. 주제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해석했는가. 그리고 작품의 균형과 마무리가 단정한가.

이 네 가지 중 하나라도 미완성이면 떨어진다. 세 가지가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없다. 전부 완성돼야 한다.


데생에는 완성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림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다 그렸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나도 시간이 지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대상의 본질과 형태를 충분히 전달했는가. 더 이상 손댈 부분이 없는가. 이 질문들이 그림 앞에서 끝없이 떠오른다. 지우고 다시 긋고, 또 지우고 다시 긋는다. 연필 가루가 손 옆에 쌓이고, 종이 표면이 조금씩 거칠어지면서도 그림은 여전히 미완인 것 같다.

데생은 완벽함이 아니라, 표현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뒤로 가서 보는 이유

입시 미술학원에서 반복해서 보이는 장면이 있다.

그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걷고, 두 팔짱을 끼고 그림을 바라본다. 다시 자리에 앉아 몇 선을 긋고, 또 일어나 뒤로 간다. 이 행동이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된다. 나도 그랬다.

가까이서 보면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다. 손이 닿는 부분만 보이고, 전체가 안 보인다. 비율이 틀렸어도 모른다. 빈 공간이 어색해도 느끼지 못한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순간 보인다. 어떤 선이 흔들렸는지, 어디가 너무 진한지, 무엇이 비어있는지. 거리를 두면 전체가 보인다.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투자

투자도 데생과 같다.

선부터 긋지 않고 바로 데생을 그리려는 사람이 있다. 기본도 없이 종목 하나를 집어 들고, 차트만 보고, 뉴스만 보고, 확신에 차서 매수 버튼을 누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시간이 말해준다.

기본 지식을 먼저 익히고, 관찰하고, 준비한 다음에 시작해야 한다.

투자에도 완성은 없다.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도중에 실패했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선 긋기를 반복하다 보면 데생이 되듯, 실패를 반복하다 보면 투자가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기 그림에만 너무 빠져들지 마라.

투자는 확신의 게임이 아니다. 확신은 자기만의 세계를 그리고 스스로의 스토리를 만든다. 확증 편향이 거기서 시작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는 것. 그게 데생에서도, 투자에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행동이다.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는 투자자. 그게 내가 바라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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