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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 "가져가라" 한마디 — 컴퓨터를 제일 사랑하는 형이 내어준 것

by 우노디야(백운호) 2026.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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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아, 미안한데 컴퓨터 하나만

새벽 4시,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이다.

모니터 불빛만 하얗게 켜져 있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조용한 집 안에 울린다. 딸아이는 방에서 자고 있고, 아내도 잠들었다. 이 시간이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작업을 하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이 컴퓨터.

형 거다.


형아, 미안한데 컴퓨터 하나만 알아봐줄 수 있어?

시작은 그 한마디였다.

컴퓨터가 필요해서 형한테 말을 꺼냈다. 그냥 가격대가 어느 정도인지, 뭘 사면 좋은지 알아봐 달라는 거였다. 그런데 형이 내어준 건 정보가 아니었다. 형 본인의 컴퓨터였다.

"나는 노트북 쓰면 되니까. 가져가라."

딱 그게 전부였다. 더 설명도 없었고, 아쉬운 내색도 없었다. 형은 원래 그렇다.

우리 집에서 형은 컴퓨터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조립부터 프로그램까지 혼자 다 한다. 컴퓨터에 대한 애착도 누구보다 크다. 그런 형이 본인 컴퓨터를 선뜻 내어줬다는 건 — 나한테는 작은 일이 아니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지금 내가 새벽에 이렇게 앉아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것, 모두 형 덕분이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나에겐 2살 위의 형이 있다.

어릴 때 늘 형이 간 자리에 내가 있었다.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같은 학교였다. 형이 졸업하면 내가 입학하는 식이었다. 선생님들이 형 이름을 기억하는 덕에 나는 처음부터 낯선 얼굴이 아니었다.

막내라서 그런지 부모님은 늘 나를 더 이뻐해 주셨다. 형과 싸울 때면 내 편을 들어주셨다. 그때마다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억울하다는 내색도, 서운하다는 표정도 없었다. 그냥 넘어갔다.

어릴 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목마를 타다가 팔에 금이 갔다

한 번은 형이 목마를 태워준다고 한 적이 있었다.

형 어깨 위에 올라타서 신나게 흔들었다. 형이 힘을 못 이겨 내가 떨어졌다. 팔에 금이 갔다. 부모님이 달려오셨고, 나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부모님이 형에게 혼을 냈다. 한참을.

다 내가 좋아서, 내가 먼저 흔든 건데. 말이다.

형은 "미안"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억울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형과 나의 대화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은 늘 적게 말하고, 많이 참았다.


지금도 형은 그렇게 표현한다

어른이 된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부산을 갈 때면 형은 조카 — 우리 딸아이 — 에게 툭하니 뭔가를 던지고 방으로 들어간다. 야근 근무를 마치고 늦게 들어온 날도 그렇게 한다. 자기 전에 뭔가 하나 챙겨두고 잠드는 것. 그게 형의 표현 방식이다.

말로 하지 않는다. 행동으로만 한다. 부산 사람이기도 하고.

동생으로서 형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늘 든다. 생일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다.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먼저 연락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가끔 형과 찍은 어릴 때 사진을 꺼내 본다.

같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 방에 누워서 같이 만화책을 보던 기억, 야식으로 라면을 나눠 먹던 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지금은 소중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서로 나이가 들고 사회로 나와보니, 형제들의 관계가 이렇게 무뚝뚝해질 줄 몰랐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사는 일이 생기면서, 연락도 뜸해지고 보는 횟수도 줄었다.

그래도 형은 형이다.

뭔가가 필요하다고 하면 아무 말 없이 내어주는 사람. 조카한테 말없이 뭔가를 쥐여주고 잠드는 사람. 언제나 한발 뒤에서 묵묵히 있는 사람.

새벽에 형 컴퓨터로 이 글을 쓰면서 생각했다. 형 생일이 언제였더라. 내년엔 꼭 챙겨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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