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문고에 들어갔지만
운 좋게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교복을 입고 학교 정문 앞에 섰을 때는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모님도 기뻐하셨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달랐다. 야구부 친구들은 새벽부터 운동장을 뛰고 있었고, 영어 수학을 특별하게 잘하는 친구들은 이미 다른 차원에 있었다. 1년을 공부해보고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아니다.
고2 때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미술을 하고 싶다고.
유치원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특별히 잘하지는 않았지만, 크레파스를 잡고 뭔가를 그릴 때만큼은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 마음을 오랫동안 묻어뒀다가 고2 때 꺼내든 것이었다. 인문계에서 예체능으로 간다니 부모님의 반대는 거셌다.
"한 번만 저를 믿어 주시겠어요?"
그 한마디로 설득했다. 다음 날 바로 미술학원을 등록했다.
야구방망이에 엉덩이가 부을 정도로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학원 첫날부터 느꼈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예술고 출신이었다. 눈을 감고도 선을 긋는 것 같았다. 나는 연필 쥐는 힘 조절부터 달랐다.
학원은 대학 합격률로 경쟁하는 곳이었다. 선생님은 엄격했다. 못 그리면 맞았다. 야구방망이에 엉덩이가 부을 정도로 맞았다.
한 번은 너무 맞아서 집에 가는 길에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버스를 놓칠까봐 빠르게 걷고 싶은데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더니 물었다.
"학생 괜찮아? 차에 태워줄까?"
그 말에 눈물이 터졌다. 억지로 참았다. 집에 가서 그런 모습을 보이면 부모님과의 약속이 달라지기에, 현관문 앞에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신발을 벗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아셨다. 그날 밤 셋이 울었다. 부모님은 당장 학원에 달려가겠다고 하셨고,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렀다.
2년 동안 정면만 외웠다
나는 남들보다 시작이 늦었다. 예술고 출신들은 이미 몇 년을 앞서있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모든 석고상의 정면만이라도 다 그려보자.
어차피 모든 각도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하나만이라도 완벽하게 하자. 매일 학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남아서 그렸다. 집에 돌아와서도 눈을 감으면 석고상의 선들이 보였다. 2년 동안 그랬다.
드디어 실기시험 날이 왔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교실 밖 복도에서 손을 비볐다. 긴장이 됐다. 석고상이 배정됐다. 번호표를 뽑는 손이 떨렸다.
자리에 앉았다. 앞을 바라봤다.
완전 측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옆에 앉은 친구들은 이미 연필을 들고 시작했다. 나는 몇십 분 동안 연필만 쥔 채 석고상을 바라봤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다 잠시 생각했다.
2년 동안 정면을 외웠다. 지금 측면에서 보고 있지만, 이 석고상의 정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안다.
그리기 시작했다.
종료 소리가 들렸다. 연필을 놓았다. 완성했다.
뒤에 앉아있던 친구가 일어나서 내 그림을 들여다봤다. 신기하다는 표정이었다. 완전 측면 석고상 앞에서, 내가 그린 그림은 완전 정면이었다.
끝까지 완성했기 때문에
당시 채점 방식은 각 자리가 아닌, 모든 그림을 바닥에 깔아놓고 채점하는 방식이었다.
합격했다.
무엇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꿈에 그리던 대학에 입학하고, 디자인 학부에서 1년을 보낸 뒤 전공을 선택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디자이너. 그 첫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직업과 꿈은 다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하나를 느꼈다.
직업이 꿈이 되면 삶은 허무해진다. 직업은 절대 꿈이 될 수 없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나의 꿈은 디자이너가 아니다.
나의 꿈은 디자인을 좋아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어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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